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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메뉴얼과 최초접촉한 날로부터 일주일. 그간 두 개의 오염지역을 합치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고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껏 확보한 일반적인 토양과 비견되는 범위의 영역이 양분으로 넘쳐나는 지역이 되었다.
사방이 막힌 답답한 상황에 숨구멍이 트이자 말라가던 뿌리들이 활력을 되찾았고 당장에 줄기를 뽑아 올릴 에너지를 축적해냈다. 이 토양은 밤이 되어도 얼지 않아서 안정적인 양분 공급원이 되었고 그 덕에 뿌리를 뻗치는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긍정적인 토양 곳곳에 뿌리를 심은 이후에 다른 오염지대로 관심을 돌렸다. 한 번의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부른다지 않는가. 배도 빵빵하고 안전지대도 명확하게 그어놨겠다. 질러보자. 그런 심정이었다.
나를 기준으로 좌측은 미지의 땅이다. 몇 가닥의 뿌리를 정찰뿌리로 명하고 보내 놓긴 했으나 아직은 일반적인 토양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우측과 아래는 일전에 체험한 대로 오염 및 위험지대.
하자.
앰버 가스와 폴 오일을 섞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 가닥의 뿌리를 뻗어 코덱스 호러와 포이즈너 포일이라는 감염 계열 두 지대를 연결.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일이 벌어진 건 하루 뒤였다.
[스킬:끈질김이 반응합니다.] [어포틱 밸런스 저항력 : 0.01%] 윽!
도청하듯이 얇은 흙 알갱이들 뒤에서 눈치를 보던 뿌리에 경련이 인다. 순식간에 내 본체 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무언가. 나는 얼른 그쪽으로 이어지는 원뿌리를 끊어냈다. 불과 몇 초 되지 않는 사이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손가락 끝부터 팔뚝까지 몽둥이로 후려치는 듯한 감각.
[어포틱 밸런스 저항력 : 0.02%] 썩을.


끊는 게 늦었다. 이미 독이 퍼진 모양. 그래도 독의 양이 적은지 최초의 감염되었던 뿌리처럼 경련이 일거나 제어가 불가능하진 않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모든 방향으로 뿌리를 뻗었다. 해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막연한 버둥거림이었다. EOS파워볼
[어포틱 밸런스 저항력 : 0.03%] 어두운 시야에 저 알람이 나타날 때마다 감각이 마비되어갔다. 심지어 등장하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 나는 조급해졌다. 해독할 만한 요소를 전혀 발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중 갑자기 방사형으로 뻗어댔던 뿌리 중 하나가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앰버 가스 저항력 : 1.2%] 앰버 가스.
그래도 저항이 조금 붙어서 그런지 뿌리가 바로 잿가루로 변하진 않았다. 도리어 선명하게 육체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저 부분만 통각이 돌아온 것이다.
가스에 해독작용이 있는 건가? 어쩌면 공포에 통각이 돌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모든 뿌리를 불러모아 드릴의 형태로 아래의 앰버 가스 지대로 통하는 통로를 뚫었다. 내려가면 갈수록 통각은 교란을 일으켜 이게 아픈 건지 따뜻한 건지 딱딱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드릴의 끝에서 강한 자극이 느껴졌다. 이 로투스바카라 자극은 마치 북을 귓가에 대고 치는 듯한 울림이었다.
[스킬:끈질김이 반응합니다.] [앰버 가스 저항력 : 4%] [어포틱 밸런스 저항력 : 3%] [*끈질김에 깃든 흐릿한 자아가 에너지를 방출해야한다고 외칩니다.] 자아가 깃든 것에서 놀랐으나 그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에너지의 방출. 나는 즉시 줄기를 틔워 밀어 올렸고 누군가가 봤다면 생명의 기적이라 말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양의 흙을 옆으로 밀어내며 솟구쳤다. 드릴 부근의 뿌리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의 작용에서 맹렬한 에너지가 보급된 덕이다 싹을 지표까지 내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나흘. 그동안 나는 선명해진 통각으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버텼다. 버틸 수밖에 없었다. 나를 왕으로, 황제로 모시며 바라보는 주민들의 기대를 아파서 나왔어.라는 말로 허무하게 뭉개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자 각오였다. 처음에는 작은 멋 부림이었으나 실제가 되었고 이어 부담으로 다가왔다. 기대에 응하고자 답지도 않은 대인배 행세를 하였고 운이 좋게도 잘 풀려 신뢰를 얻었다. 나는 왕이 아니다. 왕의 역할을 했던 플레이어. 역할극에 빠진 배우라고 해야 할 터다. 다만. 이 역할을 그만두기는 싫다. 적어도 누군가가 나를 왕이라 불러주는 한. 나는 계속 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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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끈질김이 반응합니다.] [앰버 가스 저항력 : 12%] [어포틱 밸런스 저항력 : 9%] [커팅 윈드 저항력 : 0.05%] 지표로 나간 줄기가 중간과정을 싹 생략하고 바로 열매를 맺는다. 봉우리고 뭐고 없다. 줄기에 그냥 열매가 달렸다. 느껴지기로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 작은 알맹이였고 그 안에는 씨앗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윽고 불어온 강풍에 의해 땅이 들썩였고 더 버티다가는 뿌리째 뽑힐듯하여 줄기로 향하는 보급을 끊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윗부분이 가벼워졌고 나는 줄기가 뜯겼음을 알았다. 열매는 아깝지만 당장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후우.

급상승하던 저항력은 각각 20%와 15%에 안착. 이때부터 모든 뿌리의 감각을 되찾았고 앰버 가스 지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나는 하루 동안 뿌리를 추스른 뒤 앰버 가스 지대 깊숙이 뿌리를 넣었다.
괜찮네?
약간 저리기는 해도 저주파 안마기와 비슷한 수준의 충격에 불과해서 좀 더 진입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뿌리가 타올랐고 잿가루가 변했다. 마치 그 저항력으로는 여기까지야.라고 말하는 듯하여 경계선 바로 앞까지만 뿌리를 내려놓고 멈춰 세웠다. 이후, 이 사건의 원흉. 어포틱 밸런스 지대로 뿌리를 뻗었다. 세이프게임
후욱. 훕!


속으로 기합을 내지르며 경계를 넘었고 예상대로 어포틱 밸런스가 뿌리를 타고 넘어왔다. 신속하게 뿌리를 끊으려다 의외로 괴롭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본체로 이어지는 뿌리의 경로만 차단하고 잠시 내버려뒀다.
[스킬:끈질김이 반응합니다.] 음?
[레드 메뉴얼 적응력 : 6%] [*어포틱 밸런스 적응력 : 16%] 네가 왜 이쪽에 넘어왔냐. 태세전환이 대단하다. 이제껏 느껴본 그 어떤 아픔보다 강한 자극을 준 놈이 안면몰수하고 헤헤, 나 사실 이쪽이었어.라며 와 있는 형세다. 어이가 없지 않은가. 주먹이 있었다면 당장에 코뼈를 주저앉히고 싶은 얄미움. 게다가 그새 적응력 오른 걸 보라. 소수점은 어디다 내버리고 정수단위로 오른단 말인가.
이 자식 이거.
약오르고 억울하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이 토양이 어디까지 형성되어 있는지 파악하고자 좀 더 깊숙이 뿌리를 밀어 넣었고 양분이나 범위나 레드 메뉴얼때와 유사했다. 해서 그쪽으로도 뿌리를 대량으로 퍼트렸다.
[어포틱 밸런스 적응력 : 25%] 적응력이 높아질수록 몸속을 돌아다니는 어포틱 밸런스를 세밀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또 며칠 지나지 않아 50을 넘겼을 때는 의도적으로 해당 성분을 내가 원하는 지점까지 옮기는 것도 가능했다.
좋아. 이 정도면 언제든지 쳐낼 수 있겠어. 나름의 안전장치가 마련된 셈. 그러고도 혹시 몰라 어포틱 밸런스 뿌리군이라 명명한 일반토지 지역 뿌리들에 어포틱 성분을 몰아넣었다. 저걸 앰버 가스와 섞으면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물론 그만한 고통도 생기지만, 언제고 필요할 일이 생기리라.
에너지가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위험한 발상이 떠올랐다.

레드 메뉴얼이랑 섞어 봐? 고민할 시간에 행동하라는 누군가의 명언을 떠올리며 아주 미량의 어포틱을 가져와 레드 메뉴얼에 담궈 봤으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어포틱을 머금은 뿌리를 끊어내고 레드가 흡수할 때까지 기다린 시간만 한 달. 이만하면 두 개의 영역은 상호 반응이 없다고 확신해도 되리라.
175일째.
성장은 순조롭다. 오염지대를 만나면 조합이 되는 것들을 찾거나 위치만 확인하고 둘러서 뿌리를 내리는 등의 방식으로 영역을 넓혔다.
슬슬 나올 때가 된 거 같은데. 농도가 연한 엠버 가스 지역을 찾아서 그쪽으로 뿌리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가스 아래의 지역은 질척한 흙이었고 막대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분을 머금고 있었다. 너무 많아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뿌리가 썩을 정도. 가까운 곳에 지하수가 위치한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간 학습한 대로 신중하고 조용히, 그리고 꾸준하게 움직였다.
갑자기 내가 뚫은 구멍으로 물이 솟구치면, 부레옥잠 같은 수상 식물로 전환하지 않는 이상 실패 확정이지 않겠는가. 옆으로는 거침없이 뻗어 나가되 아래로는 조심스럽게 파헤쳤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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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갑다.
    진흙의 서늘함이 아니다. 뿌리를 쉴 새 없이 치고 지나는 무언가.
    지하수!
    찾았다. 걱정처럼 물은 차오르지 않았다. 내가 땅을 연속되는 ㄹ의 형태로 파 내려간 것도 한몫하겠지만, 물살 자체가 그리 거세지 않았다. 수심이 낮은 거겠지. 뿌리의 잔털로 느껴지는 바로는 잘 쳐줘 봐야 시냇물쯤. 아마도 메인 지하수로는 따로 있고 잔가지처럼 갈래로 뻗어나온 경우가 아닐까 한다.
    어쨌건, 내게는 호재다. 식물에 있어 물은 필수.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토양의 성질을 이용해 필요한 양분을 보급했지만, 그게 어디 수분에 비할까. 물을 빨아들여 열심히 나르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영양 소모를 최소화해 뻗은 쭈글쭈글한 뿌리들이 곧게 펴지고 본래의 두께를 되찾았다. 차가운 수분이 체내를 활발하게 이동하고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불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어포틱 밸런스 이놈이 물이 있는 뿌리 쪽으로 내려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기생충도 아니고 왜 물에 끌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단 어포틱 뿌리 군으로 보급되는 수분을 대폭 줄였다. 그러자 금세 또 시무룩해져서 활동성이 줄어들고 얌전해졌다.
    어.

  • 보름이나 지났을까. 어포틱 뿌리군에서 수상한 걸 발견했다. 놈들이 똘똘 뭉쳐서 구의 형태로 변한 것. 언뜻, 뿌리에 매달린 모습이 감자를 연상케 한다. 나는 해당 뿌리들로 통하는 양분을 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동안 별 탈 없기에 잊고 확장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기존의 속도를 10이라고 한다면, 물을 얻은 지금은 50, 토양의 상태에 따라 100까지 상승할 정도로 공격적으로 뿌리를 퍼트렸다. 오염지대를 만나면, 저항력이 높은 지대는 희생을 감수하고 치고 들어갔다. 보급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전과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저항력이 높아지면 고통도 준다는 걸 알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이 순간부터 내게 토양으로의 진입은, 저항력을 올리기 위한 수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이프파워볼

    어포틱 뿌리군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반응이 늦었고 나는 그걸 저것들이 의도적으로 마비시켰다고 판단했다. 토양이 사냥을 하는 세상이다. 세균도 어쩌면 지성을 지녔을지 모를 일. 방심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공격 및 방어 수단을 준비하고 해당 지역으로 뿌리를 보냈다.
    딱딱해.
    낮인데 이렇다는 건, 힙노시스 샌드가 변한 걸까. 의문은 금방 풀렸다. 조금만 옆으로 이동해서 들어가자 아주 쉽게 길이 뚫기 때문. 딱딱한 물체를 포위해서 좁히자 그것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거,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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